독서

경제 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4

최문경 블로그 2020. 5. 4. 10:55

7장 - 고난을 딛고 영웅이 되다.

영웅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장군의 일생을 좇다 보면 저절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장군은 32세 되던 해 무과에 29명 중 12등으로 급제했다. 그리고 당시 문반 중심 사회에서 무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맨 처음 장군이 받은 벼슬은 함경도 권관으로 종9품의 그야말로 미관말직이었다. 장군이 부임한 곳은 함경도의 동구비보, 머나먼 국경 수비대의 초급 장교였다. 국경을 지키기 위해 4년 동안 추위와 싸우면서 여진족의 끊임없는 도발에 맞서야 했다. 그러다 장군에게 훈련원 봉사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역시 종8품의 미관말직이었다. 그 후 충청 병사의 군관을 거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로 발령이 났다. 수군과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2년 후, 장군은 파직당했다. 한성에서 온 군기경차관 서익이 발포의 군기가 엉망이라며 그를 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서익이 지난날 장군이 자신의 인사 청탁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짙었다. 장군은 넉 달만에 복직되었다.

마흔두 살의 장군은 또다시 북행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함경도 조산보만호로 전근했다. 그다음 해에는 두만강 어귀의 녹둔도 둔전관에 임명되었다.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오는 여진족을 막기에 녹둔도의 병력은 너무 빈약했다. 장군은 병력 증강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그 틈에 적이 쳐들어와 많은 양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포로 60여 명을 되찾기도 했으나 절도사는 피해의 책임을 장군에게 물었다. 장군은 해임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46세이던 1589년 장군은 정읍현감에 임명되었다. 종6품이었다. 8개월 후, 장군은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육군의 일선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부임하지 못했다. 너무 빨리 종6품에서 종3품으로 진급한다는 이유로 대간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장군은 진도군수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 첨사로 전직되었으며, 이곳에도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인사의 난맥상이었다. 장군 개인에게는 마음 붙이고 공무를 돌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장군은 쉰이 가까운 나이에 수시로 바뀌는 교지를 들고 변방의 임지를 떠돌아야 했다. 이처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장군은 비주류의 설움을 알고 살았다.

 

마침내 역사가 되다.

송백은 서리를 당해서야 그 푸름을 안다고 했던가? 장군의 진가는 전쟁이라는 국난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라좌수사로 지역의 수군 책임자가 된 장군은 바다 건너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장군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기를 엄정히 했으며, 판옥선의 건조와 수리에도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장군이 우려한 대로 전쟁이 터졌고, 장군은 7년간의 정쟁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역사에 그 이름을 새겼다.

 

경영교훈

스스로 쌓은 핵심 역량

이순신은 아주 바쁜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활쏘기 연습으로 명궁이 되었다. 또 학습과 연구도 꾸준히 해 병범, 전략, 전술뿐만 아니라 정보의 수집과 활용, 사무 처리 등 행정에서도 남들이 따라갈 수 없는 핵심 역량을 쌓았다. 이러한 핵심 역량이 바탕이 되어 백전백승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늘이 내린 영웅이 아니라, 노력과 인내를 통해 스스로 자란 영웅인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연구와 연습에 몰입하는 끈기가 있다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 있어야 발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뭔가 부족하고 어려운 점이 있어야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그 결과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필요는 경쟁력의 어머니라는 말을 뒷받침하듯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자원이 부족한 나라들이 오히려 국가 경쟁력이 높다. 반면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와 남미의 국가들은 대부분 국가 경쟁력이 약하다. 부족하고 어려운 것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면 현상에 안주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나도 저자처럼 어느 분야에서든 스스로 연구와 연습에 끈기를 가지고 몰입한다면, 누구든지 전문가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관련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전문가에 도달하는 과정이 조금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끈기를 가지고 연구와 연습에 몰두해 웹 프로그래밍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되도록 할 것이다! 또, 나는 재능이 없기에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

 

 

 

8장 - 노량에 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일본은 통일하고 그 야망을 주체하지 못해 마침내 조선과 명나라 정벌에 나섰던 일본 통치자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전선에 즉각 알려졌다. 명량에서 대패한 이후 왜성을 쌓고 꼼짝하지 않고 숨어 지내던 왜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후퇴, 7년간의 전쟁을 접으라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꼈던 장군)는 당시 순천 예교에 왜성을 쌓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한 후퇴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갈 길은 없었다. 장군의 함대가 예교셩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척후선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다. 남의 전쟁에 와 있던 진린은 뇌물에 넘어갔고, 덕분에 왜군은 협공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1598년 11월 18일 밤, 대규모 왜군 함대가 노량 바다에 나타났다. 고니시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장군은 즉각 유도의 해상 봉쇄를 풀고 왜군 함대와 맞서기 위해 노량으로 출동했다. 당시 왜군은 대선 300여 척에 6만여 대군이었다. 여기에 맞선 장군의 함대는 전선 83척에 수군 1만 7000여 명이었다. 명나라 수군도 함께 싸웠다. 장군이 적 함대와 마주친 것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 깜깜한 관음포 바다에서였다. 적은 관음포로 몰려들었다. 왜적은 관음포가 막힌 포구가 아니라 남해읍 쪽으로 연결된 바다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음포로 몰려간 적선은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채 포위되고 말았다. 장군 역시 맨 앞에서 전투에 몰두했다. 어느덧 날이 훤히 밝았다. 장군은 직접 북채를 들고 뱃전에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장군의 북채가 뱃전에 툭 떨어졌다. 그 순간 장군이 비틀거리는 것을 본 조카와 송희립이 달려왔다. 장군의 가슴에서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장군의 마지막 말이었다. 장군의 나이 쉰넷, 불멸의 영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군이 죽은 후에도 관음포 앞바다에서는 전투가 이어졌다. 장군선의 군사 외에는 장군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정오가 되지 않아 전투는 끝났다. 패배한 적선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전투가 한창일 때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멀리 미조 앞바다를 거쳐 큰 바다로 도망갔다. 마침내 전투가 모두 끝났다. 곳곳에서 조선 수군의 환호성이 올랐다. 그러나 장군선은 조용했다. 응당 길에 천아성이 울리고 흥겨운 승전고가 울려 퍼져야 할 정군선은 조용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적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는 장군선으로 다가왔다. 장군선 가까이 다가온 그는 장군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는 세 번이나 넘어지면서 장군선으로 올라 장군의 주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린은 통곡했다. 그제야 군사들이 모두 뱃전에 엎드렸다. 조선 수군의 피 어린 통곡에도 장군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순신 자살설 생략)

 

나 또한 이순신 자잘설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순신 자살설이 일면 설득력을 갖게 만든 당시의 세태를 지적하고 싶다. -196p

 

경영교훈

이순신 생태계를 만들자

우리가 혹독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부와 기업 등 각계각층에서 이순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풍토, 즉 이순신 생태계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급선무다.

 

신상필벌과 공정성

이순신은 부하를 사랑하고 종들의 공로까지 최대한 포상하려고 노력했지만 부하들의 죄는 용납하지 않았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인이 잘못을 저지를 부하들을 처벌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 회장은 인사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상필벌이라며,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잘 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신상필벌 제도가 없다면 회사나 국가는 발전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경영 철학을 갖고 있었다.

 

나의 생각

내가 먼저 이순신과 같은 성품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신상필벌에 대한 것은 군대에서 정말 많이 느낀 것 같다. 신상필벌이 확실해야 군기도 제대로 잡히고 지도자의 위상도 높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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