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빈손으로 재기하다.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일본은 전선이 부족해 본국에서 군비를 조달하기 어려워지고 수륙병진책도 추진할 수 없었다. 또 의병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육지에서의 전쟁도 일진일퇴를 거듭하자 일본은 명나라와 지루한 종전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선조는 일부 사람들의 모함과 일본 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가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함거(죄인을 호송할 때 사용하던 수레)에 가두어 한양으로 압송했다. 한 달여 후인 4월 1일 가까스로 석방된 장군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조선시대에 중죄를 지은 무관에게 일체의 관직과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참전케 하는 처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순신은 직위도 없이 싸움터에 나가야 했다.
한양을 떠난 장군은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장례도 죄인이란 신분 때문에 못 치러드린 죄책감을 품은 채 아산, 순천, 구례, 하동, 삼가를 거쳐 합천 땅 초계에 도착했다.
석방된 지 약 3개월 후인 7월 18일 장군은 그곳에서 통한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패배했다는 비보였다. 장군은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라고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도원수 권율이 대비책을 묻자 장군은 군관 아홉 명만을 대동하고 곧 길을 나섰다. 자신이 직접 현장을 보고 결정하려 한 것이다.
그때 장군의 마음은 매우 급했다. 억수 같은 비를 무릅쓰고 7월 21일까지 4일간 삼가, 단성, 곤양을 거쳐 노량까지 꼬불꼬불한 당시의 길로 200킬로미터 이상을 다닌 것이다. 장군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조선 수군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조선 수군이 없다면 이 전쟁은 끝난 것이다 다름없다. 이제 왜적은 서해의 뱃길을 타고 곧장 북상할 것이다.
당시 장군만큼 바쁜 발걸음을 옮긴 이가 또 있었다. 한양에서 장군을 찾아 내려오던 선전관 양호였다. 그는 장군에게 전할 교지를 갖고 있었다.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였다. 조선 조정은 나라의 명운이 이순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597년 8월 3일, 마침내 교지가 장군에게 전달되었다. 장군은 진주 인근의 운곡에 위치한 손경례의 집 마당에서 거적을 깔고 네 번 절한 후 교지를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다시 길을 떠났다. 하동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북상했다. 8월 5일 이순신은 구례를 출발해 압록강원에서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 곡성읍성에 도착했다. 백성들이 피란을 가서 읍성 안팎은 텅 비어 있었다. 아침 일찍 곡성읍성을 떠난 장군이 곡성군 옥과면에 다다르니 5리(약 2km) 밖까지 사람들이 나와 환영해주었다. 8월 9일 장군은 낙안에 도착했다. 옥과에서와 같이 백성들은 5리 밖까지 나와 장군을 맞이했다.
칠천량해전에 참가했던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투 초기에 그의 전선 12척을 지휘해 전장에서 빠져나왔고, 그 배는 횡령포에 있었다. 1597년 8월 18일, 장군은 횡령포에서 12척의 배를 인수받았다. 그날 배설은 수질을 핑계 삼아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장군은 왜 곧장 횡령포로 오지 않고 이 먼 길을 돌아서 왔을까? 꼬불꼬불한 당시의 길로는 2000리(약 800km)가 넘었을 먼 길을 돌아서 온 장군의 여정. 그 여정에서 나는 장군의 진면목을 보았다.
첫째, 민심을 수습했다. 전투는 군사가 하지만 전쟁은 백성이 하는 것이다. 민심이 흩어지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장군은 알고 있었다.
둘째, 군사를 모았다. 장군이 나타나자 도망갔던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 초계를 출발할 때는 휘하 군관이 고작 아홉 명뿐이었으나 각 고을을 돌 때마다 군사가 늘어났다.
셋째, 행정력을 복원했다. 장군은 대장정 도중 각 고을 현감들과 자리를 자주 가졌다. 당시 고을 사또들도 크게 동요했다. 나라의 명운이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벼슬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목숨을 재촉하는 행위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방 현감들은 장군을 만나면서 불안감에서 벗어났다.
넷째, 엄격한 군기를 세웠다. 장군은 휘하 장수 이몽구가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쳤다. 비록 한미한 군대지만 군율이 칼날처럼 서 있어야 한다는 소신의 발로였다.
다섯째, 무기를 모았다. 체포될 당시 장군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천자포, 지자포 등 대포 300문, 그리고 300척 이상의 전선을 원균에게 인도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이삭줍기를 하듯 하나하나 모아야 했다.
당시 장군이 대장정을 하며 전선을 정비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한 달이었다. 초계에서 칠천향 패전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이 7월 18일, 장홍의 횡령포에서 전선 12척을 인수받은 것이 8월 18일이니, 꼭 한 달이 걸린 것이었다. 그 급박했던 여름 한 달, 장군이 맨손으로 하나씩 조선 수군을 복원한 데는 당시 왜군의 치명적인 전략상 실수도 한몫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을 때, 왜군은 그 여세를 몰아 서해를 통해 바로 한양으로 진격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서해 바닷길 대신 육로를 선택했다. 바닷길로는 사나흘이면 갈 수 있는데 굳이 육로를 선택한 것은 장군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이들이 한양까지 진격하는 데 걸리는 약 한 달간의 시간을 번 것이다. 만약 왜군이 서해를 통해 곧장 한양으로 들이닥쳤더라면 장군은 아무것도 수습하지 못하고 조선의 멸망을 지켜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장군의 장정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장군이 다닌 길은 왜적이 진군한 바로 그 길이었다. 적과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장군은 그 현장을 찾아다녔다. 오로지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다시 모으려는 일념에서였다. 2000여 리의 대장정, 적의 턱밑을 파고드는 대담한 장정으로 장군은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그것은 전쟁의 물줄기를 되잡고 조선을 구한 대장정이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고난의 길이었다.
경영교훈
이순신과 서번트 리더십
이순신은 백성이나 부하를 부림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으로 본 진정한 서번트 리더(servant leader)였다. <서번트 리더의 조건>의 저자 알렉산더 버라디(Alexander J. Berardi)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는 섬기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그런 섬김의 필연적인 결과로 리더의 지위를 떠맡았다. 간디, 테레사 수녀, 예수, 부처, 슈바이처 등과 같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고셍서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다가,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지도해야 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서번트 리더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순신은 당항포해전에서 일본 전함 30척을 격침한 후, 육지로 올라간 적의 패잔병이 도망갈 수 있도록 배 한 척을 남겨두라고 명령했다. 육지로 올라간 패잔병이 우리 주민에게 만행을 저지를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에게 바다로 도망갈 길을 터준 것이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육지에 있던 100여 명의 일본 패잔병이 다음 날 새벽에 남겨둔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오자, 이순신은 미리 매복시킨 우리 수군으로 하여금 섬멸토록 했다.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섬멸한 이유 중 하나도 왜군 패잔병이 육지로 도망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우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신뢰재의 가치
이순신은 위급한 정쟁의 와중에 빈손으로, 그것도 빠른 기간 안에 군사와 물자를 모았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장군이 다시 오시니 이제는 살게 되었다."라며 스스로 돕겠다고 모여들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그를 믿었고, 연전연승한 장군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적었지만 '신뢰'라는 재산을 크게 쌓았다는 점에서 장군은 정말 부자였다. 그가 주위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직하고 원칙에 충실한 몸가짐 때문이었다. 그는 출장 갈 때 지급받은 쌀이 남으면 반드시 도로 가져와 반납했다. 또 상관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무리하게 승진시키려 하자, 이를 저지한 적도 있다. 이런 성품 탓에 이순신은 윗사람에게는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부하들은 그를 진심으로 신뢰했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
이순신의 부하 사랑 역시 남달랐다. 장수로서 품위가 없다고 모함을 받을 정도로 부하들과 마음을 트며 같이 일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궁색한 사람에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준 일화도 있다. 이순신은 오랫동안 쌓은 신뢰라는 재산을 바탕으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군사를 모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4장 - 명량대첩의 승리를 견인하다.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 새벽, 장군은 별망군에게 이런 보고를 받았다.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 우수영의 장군은 곧 전선 13척(횡령포에서 12척을 인수 받은 후,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전선 1척이 합류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오전 8시경. 명량의 조류는 역조였다. 즉,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조류였다. 해남 완도쪽으로 쳐들어오는 적의 입장에서는 순류를 타고 있었다. 반면 장군의 조선 수군 전선 13척은 역조를 헤쳐나가기 위해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야 했다.
이 길목을 지키리라
장군은 명량을 선택했다. 천혜의 지형과 조류를 활용하기 위해서다. 명량해협의 폭은 평균 500미터지만 해협 양안에 암초가 있어 배가 다닐 수 있는 너비는 평균 400미터에 불과하다. 명량해협 중에서도 울돌목은 너비가 300미터로 가장 좁다.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이곳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명량해협,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길인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가장 센 곳이다. 서해를 거쳐 한강으로 진출하려는 적은 반드시 이 물길을 지날 것이다.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하면, 오전 8시경이 조류가 가장 세다고 한다. 날이 밝자마자 왜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류를 타고 왔다. 비록 이순신이 있다고 하지만 조선 배는 고작 13척, 200척의 대함대는 그냥 지나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당시 적은 선봉대와 중군, 그리고 후발대로 나뉘어 있었다. 장군은 우리의 배를 일자진으로 정렬시켰다. "적이 비록 1000척이라도 우리 배에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동요치 말고 맞서 싸워라." 장군은 조선 수군을 독려했다. 그러나 조선 함대의 전열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 위에 멈춰 서 있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격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으나 배는 저절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장군선 홀로 싸우다.
200척이 넘는 적선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싸우기도 전에 조선 수군은 기가 꺾였따. 장군의 배를 제외한 나머지 12척의 조선 수군 배들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주춤주춤 물러났다. 장군은 진열과 대형을 유지하도록 독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명량의 급류 위에는 이제 장군의 배 한척만이 남았다. 적은 장군의 배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러나 장군은 꿈쩍하지 않았다. 밀려오는 적선을 바라보며 장군이 직접 북을 쳤다. 동시에 장군선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대장군전이 날아가 적선의 선두함에 꽂혔다.
적은 조총으로 응사했다. 장군선의 뱃전에 적탄이 무수히 꽂혔다. 다시 화포 소리가 울리면서 어른 머리통만 한 돌이 날아갔다. 장군선이 발사한 단석이 적의 전함을 깨뜨렸다. 그러나 적의 기세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앞다투어 장군의 배를 향해 덤벼들었다. 선제 함포 공격에도 적의 전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멀찍이 물러나 있던 12척의 조선 수군들은 장군의 패배를 예감했다. 어선을 타고 전선으로 위장한 채 시위를 벌이던 피란민과 백성들 사이에는 이미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장군의 최후, 조선 수군의 최후를 예감했다. 장군이 다시 북을 울렸다. 장군선에서 화포와 화살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장군선의 화포와 화살을 왜군선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다시 장군선에서 화포 소리가 진동했다. 잠시 주위가 고요해졌다. 마치 수많은 박쥐 떼가 밤하늘을 나는 듯한 소리만 들렸다. "쏴아" 하는 소리가 명량 바다를 가득 메우는가 싶은 순간, 마치 벼락으로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조란탄을 발사한 것이다. 조란탄이란 새알 같은 모양으로 주조한 철탄으로 천자총통의 경우 한 번에 400개에서 500개를 발사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기관포탄이 쏟아지듯 적의 배를 타격했다. 왜선단의 선두 함대가 장군선의 집중 포격을 받아 침몰했으며 그 뒤로 조류를 탄 다른 적선들이 들이닥쳤다. 장군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12척의 아군 전선이 뒤쳐져 미적거리고 있었다. 장군이 드디어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전장에서 대장이 장수들을 부를 때 사용한 깃발들을 통칭하는 이름)를 세우니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왔다. 이 때의 상황을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했다.
대첩을 승리로 이끌다.
왜선에 대항해 장군선이 선저하자 물러나 있던 조선 수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척, 두 척, 장군선 가까이 다가와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는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적장이 바다에 빠져 있었다. 장군은 적장을 배 위로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대장선에 높이 매달았다. 그러자 적선에서는 동요가 일었다. 반대로 조선 수군의 기세는 드높아져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던 어느 순간, 갑자기 바다가 조용해졌다. 장군과 조선 수군 쪽으로 거세게 밀려오던 조류가 멈추고 반대 방향으로 조류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둥 둥 둥..." 장군선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선 수군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그날 정오를 넘긴 시각이었다. 왜군의 본대가 뱃머리를 돌렸고 조선 수군과 피란민들 사이에서 함성이 올랐다. 장군은 추격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적의 후미 선단이 명량을 완전히 돌아 나갈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명량대첩이다.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중 31척이 격침되었다.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다. 이 명량대첩으로 이순신은 빼앗겼던 제해권을 되찾았다.
경영교훈
이순신과 5단계 리더쉽
이순신은 승리의 공을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부하들의 공으로 돌리는 겸양의 미덕도 보여주었다. 그는 임금에게 승전 보고서를 올릴 때도 부하들의 공을 앞세웠으며 심지어는 종들의 이름까지 적어 전승의 업적이 함께 전투에 임한 부하들의 것임을 강조했다. 저명한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는 경쟁 기업을 압도하는 탁월한 성과를 내고 이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위대한 기업을 만든 리더들의 공통적인 특지을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이들 리더들은 뛰어난 업무 능려그 팀워크 능력, 관리자로서의 역량, 비전 제시와 동기부여 역량은 물론, '헌신과 겸양의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구성원의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어떠한 성공도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공적을 구성원들에게 돌리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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