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경제 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1

최문경 블로그 2020. 4. 30. 10:42

1장 - 경제 전쟁 시대, 왜 이순신인가?

이순신의 상생(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가다.) 경영

 

맑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살을 에듯 추워 여러 배에 옷 없는 사람들이 목을 움추리고 추워 떠는 소리를 차마 듣기 어려웠다. 군량도 도착하지 않아 이 역시 답답했다.  - 난중일기中

 

이순신은 전시였던 만큼 강압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군수물자를 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대와 백성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둔전(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토지) 개발을 통한 곡식 재배 등 생산 활동이나 상거래를 통해 군수물자를 조달했다고 한다.

 

공(이순신)이 진중에 있으면서 항상 군량 때문에 걱정해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 짓게 하고, 사람을 시켜 고기를 잡았으며, 소금 굽고 질그릇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하는 일이 없었고, 또 그것들을 모두 배로 실어내 판매해 몇 달이 채 안되어 곡식 수만 석을 쌓게 되었다. - 이충무공행록中

 

신이 남해안 해변가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이순신을 칭찬하고, 한없이 아끼고 존경했습니다. 또 들리는 말에 이순신이 금년 4월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했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가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날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 좌의정 이덕형이 임금인 선조에게 보낸 보고서 中

 

이순신이 백성들을 잘 돌봐주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순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순신은 모여드는 피란민 등 백성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었으며, 이들로부터 군수물자뿐 아니라 병력도 충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백성을 아끼고 도와줌으로써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백성의 동참과 상생의 협력관계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생각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 상생하고 협력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이기적인 생각보다는 상생하고 협력하려는 쪽으로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2장 - 학은 날개를 펴고

1592년 7월 8일, 한산 앞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석 달 남짓, 조류를 탄 조선 수군 판옥선 5,6척이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견내량.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지나 거제 앞바다로 접어들었다. 당시 견내량에는 일본 수군이 정박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모두 73척의 적선을 향해 결사대처럼 돌진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일본 수군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조선 수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퇴각 북소리가 울렸다. 조선 수군은 뱃머리를 돌려 한산 앞바다로 퇴각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수군은 기세를 올렸다.

 

넓은 바다로 유인하라.

총사령관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와키사카는 원래 수군이 아니었다. 육군의 선봉장으로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전쟁 초기 육군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였고. 조선 땅이 이제 곧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 찰나였다. 그런데 바다에서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름조차 듣지 못한 이순신이라는 조선 장수에게 일본 수군은 연전연패를 했다. 이에 격분한 도요토미가 와키사카에게 수군 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조선의 전선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고 있었고, 와키사카는 모든 함대에 전속력으로 추격할 것을 명령했다.

신호가 올랐다. 한산도 입구에 삼각형으로 높이 솟은 첨망산에서였다. 견내량으로 쳐들어간 우치적, 이운룡 등이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 뒤로는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온다는 신호가 함께 올랐다.

 

학익진법(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법)의 완승

다시 신호가 올랐다.

동시에 우치적, 이운룡의 전선이 장군의 눈앞을 지나갔다. 장군과 우리 수군은 매복을 하고 있었다. 아군 전선이 지나가자 곧 적선의 선봉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군을 뒤쫒던 배였다. 순간, 장군은 적선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적의 선봉대가 자신들의 옆구리를 노리는 조선의 전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조류와 바람을 탄 배를 멈출 수도 없었고 돌릴 수도 없었다. 적의 선봉대는 장군의 눈앞을 지나갔다. 뒤이어 적의 본대가 보였다. 순간 장군이 칼을 높이 쳐들었다. 장군의 명령만 기다리던 군사가 길게 천아성을 불었다. 거위 목을 닮은 나팔에서 길고 긴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북소리가 울렸다. 공격 신호였다. 한산도와 미륵도 그늘에서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들이 바다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퇴각하던 우치적, 이운룡 선단도 일사불란하게 뱃머리를 돌렸다. 퇴각하던 배가 뱃머리를 돌리고 섬 그늘에서 매복하던 본대가 넓게 학인진을 형성했다. 일본 함대는 오롯이 그 진 안에 갇혔다. 한산 앞바다에 학 한마리가 날개를 넓게 펼쳐 적선을 품에 안았다.

이 당시 전황(전쟁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견내량으로 조선 배 4, 5척이 오는 것을 보고 철포를 쏘며 반 시간쯤 공격하자 조선 배가 조금씩 물러가는 것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했다. 조선 배는 수로를 지나 넓은 바다에 이르자 일시에 뱃머리를 돌려 키 모양의 함대 모습을 취한 뒤 우리 배를 포위하고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니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장군이 다시 칼을 높이 들었다. 순간 독전기(전투할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달던 )가 휘날렸다. 동시에 대장선의 천자총통이 불을 뿜었다. 대장군전(천자총통으로 쏘아 보내던 크고 긴 화살)이 하늘로 솟았다. 길이 180cm, 무게 30kg, 사정거리 600m에 이르는 대장군전은 얇은 송판으로 만든 적의 안택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뒤이어 조선 수군의 각 전선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다양한 화포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궁수들은 화살을 날렸다.

적들도 응사(적의 사격에 대응하여 마주 )를 해왔다. 적의 주 무기는 조총이었는데 조선 수군은 적의 사정거리 밖에서 화포로 공격을 했다. 오로지 거북선만이 적의 선단 가운데를 휘젓고 다니며 근접 공격했다. 저들을 넓은 바다로 유인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바다에 빠진 적들은 대부분이 상륙하지 못했다. 패잔병들이 육지에 오르면 조선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장군은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해전을 펼친 것이다. 이전의 해전은 정박한 적선을 기습하고 물러나는 단순한 전투였다. 그러나 한산해전에서는 육전에서나 펼치던 학익진을 응용했던 것이다.

적장 와키사카는 갑옷에 화살이 꽂혀 몹시 위험했으나 노가 많은 빠른 배를 탄 덕분에 김해 쪽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날 일본 전선 73척 중 14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다. 한산해전에서 대패하자 도요토미는 "조선 수군을 만나면 맞서 싸우지 마라"라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선승구전(先勝求戰)이란 말이 있다. '미리 이겨놓고 난 후에 싸운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에 오르려면 싸움을 하기 전에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순신은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전투를 벌여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관할 지역의 지형과 조류를 조사했다. 또 전투 시 긴요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요충지를 파악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필요한 곳에는 수중에 장애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 이순신은 적에 대한 정보도 적극 수집하고 활용했는데 탐망군과 탐망선을 파견해 적의 규모와 이동 상황 등을 세밀히 파악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볼를 토대로 일본 수군을 선제공격해 기선을 제압하고 적이 공격해 올 틈을 봉쇄했다. 다음은 이순신의 진중 생활을 기록한 글 중 한 대목이다.

 

장군은 매일 밤 허리끈을 풀지 않고 잠을 잤다. 겨우 서너 시간 잔 후에 일어나 사람을 불러 일을 의논하기를 날이 샐 때까지 했다. 또 식사는 아침저녁으로 5, 6홉의 밥으로 끝냈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일이 많은 데 비해 먹는 것이 적은 것을 크게 걱정했다.

 

나의 생각

선승구전이라는 말과 함께 이순신의 철저한 준비 정신을 보고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순신은 항상 준비되어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관할 지역의 지형과 조류를 조사함으로써 자신의 환경을 이해하려 했고, 정찰을 통해서는 적의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순신과 같이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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